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 · 25 전쟁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같은 민족인 남한과 북한이 싸운 한반도 전쟁입니다. 약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시설이 파괴되었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북한에 대한 적대심이 많이 줄어든 세대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임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북한의 미사일발사로 새벽에 울린 문자메시지가 전쟁에 대한 생각을 한 번쯤 하게 만들었습니다.
6 · 25 전쟁의 원인
국외적인 요인
- 1949년 6월 주한 미군이 철수를 완료했습니다.
- 1949년 10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었습니다.
- 1949년 말경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남한 무력 침공 계획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 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습니다.
국내적인 요인
- 남조선노동당의 실질적인 붕괴에 따라 남한 내부에 '인민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졌습니다.
- 김일성은 '민족해방을 위한 투사로서의경쟁'에서 박헌영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 남한이 아직도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태였고 국군의 병력과 장비가 열세했습니다.
- 김일성은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시켰습니다. 이러한 침략 계획을 은폐시키기 위해서 북한은 남북통일 최고 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로운 척했습니다.
6 · 25 전쟁 원인 요약
1948년 남한과 북한에 2개의 정부가 세워졌지만 남한과 북한은 다른 쪽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위 38도선 부근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즉 갈등이 심해 서로에 대한 불신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군대는 한반도에서 물러났고 남한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가 부족하여 전쟁에 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북한은 소련의 도움으로 군사력을 키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6 · 25 전쟁의 전개 과정 요약
북한군의 남침 (1950년 6월 ~9월) |
1950년 6월 25일 38도선을 넘어 불시에 남한에 쳐들어 온 북한군은 삼일 만에 서울을 빼앗었고,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여 낙동강일대를 최후의 방어선으로 구축하였습니다. |
국군, 국제 연합군의 반격 (1950년 9월 ~10월 24일) |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3개월 만에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사기가 높아진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였고 압록강에 이르러 통일을 눈 앞에 둔 상황이었습니다. |
중국군의 개입 (1950년 10월 19일~1951년 3월) |
중국이 사회주의를 지키고 혈맹관계를 유지한 북한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중국군에 밀려서 다시 서울을 빼앗겼습니다.(1 · 4 후퇴) |
전선고착, 휴전 (1951년 3월 ~1953년 7월) |
38도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한편에서는 전쟁을 멈추려고 정전 협상을 진행하였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결정되었고, 맞서 싸우던 자리는 휴전선이 되어 남북은 다시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 장군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여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6 · 25 전쟁 때는 UN최고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유엔파병 16개국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그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6 · 25 전쟁 결과 요약
남과 북 사이에 휴전선을 정해 전쟁을 멈추기로 약속하는 정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휴전협정은 정전, 쌍방 간의 비무장지대, 38선의 약간 이북을 대부분 통과하는 군사경계선 및 증강을 목적으로 한 군대와 장비의 한국 도입 금지에 관하여 규정하였습니다.)
250km의 휴전선은 강원도 철원군을 기준으로 38도 선보다 더 북쪽에 있습니다.
※ 제네바 정치 회담 (1954년 4월 개최)
휴전 협정 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북한을 비롯하여 미국, 소련, 중국 등 전쟁관련국들이 참가한 회의입니다. 하지만 국제 연합의 권위 인정 및 외국군 철수 문제를 두고 양측 주장이 대립하면서 성과 없이 끝났고 휴전 상태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남한과 유엔군 측 참전 16개국의 입장: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에 비례해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고 통일 독립된 한국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을 제시하였고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주한유엔군이 지키자고 제의하였습니다.
≫북한, 중국, 소련의 입장: 오로지 주한 유엔군의 철수를 강요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위장평화통일 제안을 내놓고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하였습니다.
▶이승만이 휴전 협정에 동의했을 때 미국이 제시한 조건 네 가지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시작한다..
- 장기간 대한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
- 휴전협정 성립 후에 개최될 한국의 정치적 통일에 대하여 90일 간 아무런 구체적인 성과가 없을 때 미국은 그 회의에서 탈퇴한다.
-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약속한다.
6 · 25 전쟁으로 입은 피해
요약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약 600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피란민들은 가족을 잃거나 가족과 헤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피란을 가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피란 온 사람들은 피란지에서 힘든 생활을 하였고, 학생들은 천막학교에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많은 문화유산이 부서지거나 사라졌습니다.
▶이산가족과 전쟁고아들이 수없이 생겨났습니다.
(전쟁 중 헤어진 가족을 이산가족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헤어진 가족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전쟁고아는 부모를 잃은 아이로 비참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국토가 황폐해졌고 건물, 도로, 철도, 다리 등이 파괴되었습니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시설의 40%, 주택의 16%가 파괴되었고, 북한의 경우는 피해가 더 심해서 전력의 74%, 연료 공업의 89%. 야금업의 90%,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에게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와 반미이데올로기 강화를 가져왔으며, 증오와 대립을 심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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