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면 단연 이순신입니다. 거북선을 만들고 100원짜리 동전에 등장하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어보면 초등학생 대부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6학년 국어교과서에서는 명량대첩을 준비하는 이순신의 비장한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국어교과서 '제게 12척의 배가 있으니" 중심내용
1. 이순신의 뒤를 이어 원균이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임금님의 부산을 치라는 계속되는 명령에 원균은 따를 수 밖에 없었고 무참하게 원균은 죽고, 조선 수군은 패배하였습니다. |
2. 1597년 8월, 이순신은 다시 삼도통제사가 되었고 전라도로 내려가면서 12척과 120여 명의 군사를 모았습니다. 나라에서는 바다를 포기하고 육군으로 싸우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임금님께 글을 올려 울돌목을 싸움터로 정했습니다. 울돌목은 육지와 육지 사이에 낀 아주 좁은 바다로 물살이 빠르고, 물 흘러가는 소리가 흐느껴 우는 소리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
3. 이순신은 우리 군사의 수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고기잡이배와 피난 가는 배들을 판옥선처럼 꾸미게 했습니다. 실제로 싸울 수 있는 배는 12척과 나중에 구한 1척 뿐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도 육지와 산봉우리를 계속 돌아다니게 하여 군사의 수가 많아 보이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순신의 명언이 나옵니다. "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 하면 죽는다. 오늘 우리는 이 말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
4.울돌목의 지형적인 특징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물살 방향이 반대로 바뀌자 적을 공격해 133척의 배를 물리쳤습니다. 바로 이 전투가 '명량 대첩'입니다. |
5. 이순신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군이 이순신의 고향 마을을 공격해 아들 면이 21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이를 악물고 끝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기로 다짐했습니다. |
불패의 신화가 된 명장 이순신 -이강엽 글 /류동필 그림
1. 더디 가도 바른 걸음
36세에 전라좌도 고흥 발포지역에 만호가 되었으나 옳고 그름을 따지며 너무 바르게 지내다 보니 윗사람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함경도에서 여진족과의 싸움이 한창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뒤에라도 효도를 하고파서 아버지 묘 옆에서 지냈는데 친구인 유성룡의 추천으로 다시 함경도 조산보라는 곳의 만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 녹둔도에서 여진족과의 싸움을 해서 승리를 했지만 우리 군의 피해가 너무 많다 보니 그 피해의 책임을 지고 임금님의 백의종군 명령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45살에 전라도 정읍의 현감으로 가게 되면서 가족과 조카를 책임질 수 있어서 이순신은 만족했습니다.
2. 준비는 승리를 낳고
47세에 전라 좌수사로 승진한 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사를 모아 곧 조선을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순신은 수군의 중요성을 임금에게 알리고 전쟁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판옥선은 1층에서 노를 젓고 2층에서 군사들이 전투를 하도록 만든 배입니다. 판옥선만으로 부족했던 이순신은 거북선을 고쳐서 배의 앞에는 용 모양의 머리를 달고 용의 입과 배의 옆부분에서는 총통을 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배의 윗부분에는 단단한 나무를 씌운 뒤 철판을 대고 쇠못을 박도록 하였습니다. 1592년 일본군이 부산 쪽으로 쳐들어 왔을 때 경상 우수사 원균이 첫 싸움에서 진 뒤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5월 4일 옥포 앞바다에 80여 척의 배를 이 끌로 갔지만 판옥선은 24척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적의 배 26척을 박살내고, 합포에서는 5척, 적진포에서는 13척을 무찔렀습니다. 이순신이 처음으로 이긴 전투가 옥포해전입니다.
두 번째 전투는 사천에서 시작되었고 이순신은 또다시 승리했지만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았습니다. 싸움이 끝난 후 총탄을 빼냈고 그 뒤 당포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를 당포해전이라고 합니다.
3. 학의 날개를 펼쳐라
수군의 승리는 계속되었지만 육군에서 계속 패하다 보니 임금님은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바로 그럴 즈음에 이순신은 적의 배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부하 장수를 시켜서 판옥선 몇 척을 이끌고 견내량으로 들어가는 척하다가 도망쳤습니다. 적의 수군은 쫓아오다가 숨어 있던 조선 수군에게 학익진 전법으로 둘러싸여 47척은 물속에 잠겨 버렸고 12척은 우리 수군에게 잡혔으며, 14척만 간신히 도망쳤습니다. 이 전투를 한산도 대첩이라고 합니다.
4. 저희를 버리고 어디를 가십니까?
선조가 명나라에 도움을 청하자 명나라 이여송장군이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일본군은 후퇴하여 부산을 중심으로 진을 쳤습니다. 이때 이순신에게는 삼도 수군통제사 라는 벼슬이 내려졌고 3년동안 전투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함정이라며 공격하기를 거부하다가 한양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죄를 물어 28일 정도 갇혀 있었지만 공을 인정받아 풀려났으나 선조는 이순신에게 두 번째 백의종군을 명령했습니다. 풀려난 지 12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5. 제게 12척의 배가 있으니 ◀ 위의 교과서 내용 참고
6. 차가운 겨울 바다
일본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철수하는 일본군을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나 어디선가 날아온 적의 총탄이 이순신 왼쪽 겨드랑이를 뚫고 지나갔습니다. 아들 회와 조카 완이 깜짝 놀랐지만 이순신은 방패로 가리라고 하면서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적이 완전히 물러나 백성들은 환호했지만 이순신은 끝내 그 환호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순신의 생애
1세 1545년 음력 3월 8일 한양에서 태어나다.
21세 1565년 보성 군수 방진의 딸과 결혼하다.
22세 1566년 무예를 익히며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
28세 1572년 과거 시험을 보았으나 떨어지다.
32세 1576년 무과에 합격하다.
36세 1580년 전라도 고흥의 발포지역 만호(무관)가 되다.
39세 158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다.
42세 1586년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가 되다.
43세 1587년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하게 되다. 오랑캐를 무찔렀으나 이일이 거짓으로 보고하여 백의종군하다.
45세 1589년 정읍 현감이 되다.
47세 1591년 전라 좌수사가 되다.
48세 1592년 4월 12일 거북선이 완성되다.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5월 옥포 해전에서 승리하다.
6월 당포 해전에서 승리하다.
7월 한산도 대첩에서 승리하다.
9월 부산 해전에서 승리하다.
49세 1593년 8월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다.
53세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하다.
4월 13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다.
7월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수군을 이끌고 거제도 칠천량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여 원균이 죽고 대부분의 배가 부서지다.
8월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다.
9월 명량 대첩에서 승리하다.
10월 막내아들 면이 일본군과 싸우다 세상을 떠나다.
54세 1596년 음력 11월 19일 노량 해전 중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다.
우리가 자녀들과 함께 광화문을 지나갈 때 이순신 동상이 보이면 기본적인 이야기는 할 수 있도록 정리했습니다. 이순신이 처음 이긴 전투는 옥포 해전이고, 3대 대첩은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 노량 해전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학익진 전법을 쓴 해전은 한산도 대첩입니다.
초등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수원 화성과 서울의 5대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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