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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초등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수원 화성과 서울의 5대 궁궐

by glesam 2023. 5. 20.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는 설명문을 배울 때 다보탑과 석가탑, 세계의 여러 나라의 탑을 배우게 됩니다. 6학년이 되면 설명문을 배울 때 수원 화성과 서울의 궁궐에 대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본질은 지식을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명문을 구성하고 중심 내용과 추론한 사실을 정리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썸네일
수원화성-서울궁궐

 

수원 화성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1. 중심내용

「화성성역의궤」는 수원 화성에 성을 쌓는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수원 화성은 일제 강점기에 성곽 일대가 훼손되었고, 6.25전쟁 때 크게 파손되었지만 「화성성역의궤」를 보고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2. 중심내용

정조 임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음 임금인 순조 때 만들어졌는데, 건축과 관련된 의궤 가운데에서 가장 내용이 많습니다. 내용이 아주 세세하고 치밀해서 공사에 참여한 기술자 1800명의 이름과 주소, 일한 날수와 받은 임금까지 잘 나와 있었습니다.

 

3. 중심내용

정조 임금의 꿈이 담긴 수원 화성은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아서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화성 열차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4. 중심내용

수원 화성 근처에는 사도 세자의 무덤인 융릉과 정조 임금의 무덤인 건릉인 융건릉을 둘러 볼 수 있고, 사도 세자의 명복을 빌 수 있는 용주사도 둘러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인물의 말과 행동, 표정을 보고 알 수 있는 사실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평소 아는 사실과 경험한 것을 떠올려 보고 무엇을 더 알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 글에서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은 수원 화성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을 만큼 훌륭한 건축물이었다는 사실과 정조 임금은 수원 화성을 건축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수원 화성 더 알아보기

수원 화성에 담긴 정조의 꿈

화성 건설을 지시한 왕은 정조였습니다. 정조의 아버지는 1762년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이고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1776년 왕위에 오릅니다. 교통의 요지였던 수원 화성은 정조의 꿈을 이룰 도시로 계획되었으며 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깁니다.

 

정조는 한양에만 있던 상설 시장을 화성안에 만들어 수원을 새로운 상업 도시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장사를 원하는 백성에게는 나랏돈을 이자 없이 빌려주었습니다. 성 밖에는 5일장이 열리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곳이 영동시장입니다. 또한 서해안의 마산포를 활용하여 국제 무역 도시를 만들고자 꿈꾸었습니다.

 

수원화성은 농사짓기에 좋은 땅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화성으로 이사 온 백성들에게 땅을 갈고 거름을 주도록 하여 기름진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성 밖에는 만석거, 만년제, 축만제 같은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을 견디도록 하였습니다. 화성을 지을 때 수레를 끌던 소 32마리를 백성들이 농사에 쓸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습니다.

 

수원 화성은 강력한 군사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로서는 가장 발전된 성곽을 쌓았고, 5천여 명의 장용영 군사들이 머물며 성을 지켰습니다. 수원 화성 부근의 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의 2만여 군사와 함께 협조를 이루었습니다.

 

[정조의 꿈을 품은 성곽 수원 화성 - 김진섭 글 ]

 

 

 

 

 

서울의 궁궐

1. 궁궐의 건물

궁궐에는 각자 자신의 신분에 알맞은 건물에서 생활했는데 강녕전이나 교태전과 같이 '전' 자가 붙는 건물은 궁궐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왕과 왕비만 살 수 있었습니다. 왕실 가족이나 후궁들은 주로 '당'자가 붙는 건물을 사용하였고 그 밖에 궁궐 사람들은 '각'. '재', '헌'이 붙는 건물에서 생활하였습니다.

 

2. 경복궁

경복궁의 건물은 7600여 칸으로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가장 웅장한 건물은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리라'는 뜻을 지닌 근정전입니다. 그 곳에서 왕의 즉위식, 혼례식, 외국 사신과의 만남 등 중요한 행사를 치렀습니다.  교태전은 왕비가 생활하는 곳으로 뒤쪽에는 아미산이라는 작고 아름다운 후원이 있습니다. 또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의 경회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누각입니다.

 

3. 창덕궁

창덕궁은 경복궁 동쪽에 있다고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로도 불렸습니다.  창덕궁 내에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 사상을 반영하여, 땅을 나타내는 네모난 연못 가운데 하늘을 뜻하는 둥근 섬을 띄워 놓은 형태입니다. 연못 가장가지에 있는 부용정은 십자모양의 정자로, 단청이 화려하고 처마 끝 곡선이 아름답습니다.

 

4. 창경궁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때 제 모습을 찾았으나, 그 뒤로도 큰 화재를 겪는 수난을 다했습니다. 정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문정전 앞뜰은 사도 세자가 목숨을 잃은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많은 건물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면서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 후 1983년 동물원과 식물원의 일부를 옮기고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5. 경희궁

처음 이름은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때 경희궁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가지 10대에 걸쳐 왕들이 머물렀고 특히 영조는 25년 동안이나 이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경복궁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궐'로도 불리었으며 원래 규모는 1500칸에 이르렀으나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헐려 터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옛 모습의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궁궐 안에는 행사를 치르는 승정전과 영조의 어진을 모신 태령전이 있습니다.

 

6.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으로 성종의 형인 월산 대군의 집이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궁궐이 불타 이 곳으로 옮겼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왕조 말기에  고종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거처를 경운궁으로 옮긴 뒤 중화전 같은 전통적 건물과 석조전, 정관헌 같은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석조전은 왕이 일상생활 하던 곳이고, 정관헌은 고종 황제가 커피를 마시며 여가를 즐기거나 손님을 맞이하던 곳입니다.

 

 

 

 

「서울의 궁궐」을 읽고 내용을 추론하여 정리해 보기

들어가는 말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 궁궐은 모두 5곳이다.
궁궐의 건물 궁궐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는데, 각자 신분에 알맞은 건물에서 생활했다.
경복궁 조선 시대 최초의 궁궐로 태조가 한양에 만든 법궁이다. 건물이 7600여 칸으로 근정전, 교태전, 경희루 등이 있다.
창덕궁 건물과 후원이 잘 어우러져 있으며, 연못에 섬을 띄운 부용지가 있다.
창경궁 화재가 여러 번 일어나고 사도세자가 목숨을 잃은 곳이다.
경희궁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고쳐 부른 곳이며 승정전과 태령전이 있다.
경운궁 선조 때 행궁으로 만들었으며, 전통적 건물과 서양식 건물이 함께 들어 서 있다.

 

경복궁 더 알아보기

▶왕의 정치 공간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 4대문 중 온 백성을 바라보는 임금님의 마음이 담긴 남쪽 문으로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높은 석축 위에 세워진 2층 건물이다.

임금님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돌다리, 영제교 - 예전에는 다리 밑으로 냇물이 흘렀는데 '이제부터 임금의 공간이 시작되니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라'는 뜻이 담긴 다리이다.

경복궁의 심장, 근정전 - 이 공간에서 국가의 중대한 행사가 열렸다.

관직을 표시하는 품계석 - 근정전 마당에는 좌우로 작은 표석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신하들의 관직을 표시한다. 동쪽은 문신, 서쪽은 무신의 자리이며, 자신의 관직에 해당하는 품계석에 맞춰 서서 행사에 참여했다.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 근정전 내부 정면에는 왕이 앉는 용상이 있다. 그 쉬에 화려한 병풍이 있는데 병풍을 옆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이 달려있다. 이 문을 통해 왕이 출입하였다.

임금의 집무실, 사정전 - 어전회의를 열고 신하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논의하였다.

궁궐 안 관청 건물, 수정전 - 수정전 옆에는 집현전을 비롯해 여러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다.

 

▶왕의 사적인 공간

 

왕의 처소, 강녕전 - 일상생활을 하고 잠을 자던 공간으로 왕실가족의 생일잔치와 신하들을 위한 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왕비의 처소, 교태전 - 중전이라고 불렀는데 왕비는 백성의 본이 되기 위해 직접 누에를 기르고 실을 뽑아 길쌈도 했다. 

대비마마의 처소, 자경전 - 경복궁 중건 당시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를 휘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조선 최고의 연회장, 경회루 - 국가 중대사와 관련된 연회를 열던 곳으로 각종 잔치와 기우제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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